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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때문에 걱정이 있다.
이 걱정은 기만의 가능성이 없는 뼈에 와 닿는 감각이다.
하지만 여전히 기만의 가능성을 주는 게 있다.
외모다.
기만의 가능성을 주는 것의 특징은,
행동이나 고민 후에, 실제적인 반응 없이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채워지는 마음의 빈 공간이다.
돈이 많았던 아이들이나
외모가 괜찮은 여자/남자들이나
덜 떨어지고 생각보다 훨씬 단순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걸 보면 마음에 거리가 생기고, 옛날에는 바꿔보려했지만, 요즘은 무시하게 되는데,
이게 내 마음에, 강 건너 불 구경하는 식의 태도를 키운 것 같다.
강 건너 불 구경하는 이 태도는, 강이라는 기만의 가능성이 있다.
불이 커져도, 나한테는 와 닿지 않는다.
아무리 사람들이 비명지르고 끔찍해보여도, 그래도 아무리 극단적으로 일이 번져도,
끝에는 결국에 내 일은 아니라는 거다.
그러면, 잠깐 슬퍼하고 애달픈 것도, 지겨워질 수 있다.
상황이 극으로 치달을 수록, 끝까지 힘겨워하며, 괴로워하는 게 아니라,
계속 상황이 이렇게 되니 지겨워질 뿐이다.
그리고 나는 실제적인 상을 얻지 못하고,
배부른 돼지처럼 어느정도를 느끼고, 그 이상은 관 두고 만다.
나는 이 태도가 싫다. 사람들에 대해 오만한 것도 싫다.
오만함을 대하는 내 생각은 이런 식이다.
저 사람이 바보같은 게 보이고, 얄팍한 게 보이는데, 나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저 단순하고 바보같은 게 보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는거야?
3일 전 쯤에 일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집에 갔다.
그 날 일에서 돈을 많이 잃었고, 월급을 못 받을 수 있다는 압박이 생겼다.
지하철에서 한 생각은 이랬다.
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잘라다 팔수 있겠다.
근데 이 건 내 꺼가 아니네.
저 머리카락도 내 꺼가 아니네.
이 사람을 갖다 팔 수 있겠다.
근데 이 사람은 내 꺼가 아니네.
이 지하철 난간을 갖다가 팔 수 있겠다. 철이니까 팔리겠지.
근데 이 난간은 내 꺼가 아니네.
지하철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왔다.
이 차도 범퍼를 갖다가 팔 수 있겠다.
근데 내 꺼가 아님.
이 교통 고깔도 갖다 팔 수 있겠다.
근데 내 꺼가 아님.
내 꺼인게 하나도 없다.
내가 가지고 갖다 팔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다 잃은 거 같았다.
누가 나에게 뭐 있나 보자 할 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잠깐, 내 반대로 바라보려는 성격때문에,
하지만 종이 위에선 내가 주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손가락을 갖고 있잖아? 내가 발을 잃었을 때 얼마나 정상적인 발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고 소중했나!
이런 식의 생각을 하며, 감동을 얻어냈었다.
하지만 오늘 다시 일에서 돈을 많이 잃었다.
가진 게 없는 것 같다.
피곤하기도 하다. 블로그에 한번 파동이 오며 신경이 많이 쓰여서,
짬 나는 대로 블로그에 눈이 가다 보니, 여기에 시간을 많이 뺏기고, 그래서 잠을 많이 못 잤다.
무기력하면 욕구들이 많이 올라오는데, 그래서 졸린 것일 수도 있다.
돈이 뼈에 좀 다가온다.
사실 아직 정말 제대로 몰려와서 나를 파도처럼 철퍽하고 때리고 목을 조르지는 못했다.
근데 조금 다가온다.
23살에 내 네이버 블로그에 "고무나무 골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군대 병원에서 썼던 것 같다. 아마 휠체어 타고, 담배를 피며 썼던 것 같다.
내용은, 요즘 뭔가 덜 느껴지는 것 같다는 거였다.
콘돔을 끼고 하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삶이 생으로 느껴지지가 않고, 그 사이에 뭔가 안전한 게 있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도 괜찮은 것 같고, 그 안정감이 기분이 나쁘고, 그 안정감을 만드는 건,
내가 아무 감각도 그 전만큼 살가죽에, 마음의 제일 여린 부분에 와닿고, 자리잡고 계속 뜨겁게하고 있는 그런 느낌을
못 느낀다는 거였다.
언젠가부터는, 고무나무골무 이야기가 내 마음의 디폴트가 된 것 같다.
멍청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부터 인 것 같다.
이상의 강렬한 빛이 꺼진 것도 걔네들이 꺼뜨린 것 같다는 원망도 든다.
변명이라고? 어쩌라고. 나쁜 말 하면 블로그 벤 먹으니까 욕은 못하겠다.
돈은 도망칠 수 없는 결국에는 삶을 실제적으로 만드는 요소인 것 같다.
좀 더 기본적으로 말하면 배고픔이겠지만..
배고픔은, 삶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나를, 다시 삶으로 계속 데려온다.
정말 강렬한 빛을 내뿜던 순수한 이상이 깨지고, 순수함을 다시 못 찾을 줄 알았는데,
사실 이상이 순수했던 게 아니라, 내가 순수했던거고,
내가 순수했던 건, 내가 삶의 현장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도대체 이건 어떻게 하는거지? 아 하고 말지 뭐. 아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생각이 전혀 없는 곳이 순수한 현장일 것 같다.
아 이거 진짜 안 하면 난 죽어. 이거 안 하면 절대 안되는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근데 정말 해야 해. 너무 힘들어!
이건 뭐지? 이건 어떻게 하는거지?
이건 이렇게 하는 건가? 이건 어떻게 생긴 거지?
이 태도에는, 이게 왜 이렇게 생긴 거지?라거나,
이걸 왜 해야 하지?는 없다.
단지 내가 해야 할 걸 관찰하고, 있는 대로, 근데 정말 높은 수준으로, 그것의 있는 그 것을 완전히 다 온 몸에 비비면서
느낀다.
어떤 사람은 옛날에 봤는데, 내가 싫어하는 인문학 강사들 중 한명이었던 것 같은데,
사람들은 바쁘기 때문에 왜 하는지도 모르고 하게 된다고 했다.
거기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적당히 바쁜 게 문제야.
적당히 해도 되는 게 문제야.
진짜 바쁘고 절박하고 끔찍할 정도로 목을 조이고, 그 것에 모든 게 달리면,
왜 하는지도 모르고 하게 된다는 단점은 사라지고,
거기서 새로운 인식이 태어나고, 새로운 길이 열리고, 한 층 더 높인다는 장점이 훨씬 더 부각될 걸.
배고픔은 도망칠 수 없는 삶의 현장이다.
외로움은 도망칠 수 없는 영혼의 현장이다.
이 완전한 균형, 완벽한 생명을 져 버려선 안된다.
그 둘에, 다리가 안 닿는 물에 빠져서, 수영도 못하는 채로 기이한 헤엄을 쳐야 한다.
수영을 할 줄 모르지만, 살아는 해야 하는 거.
이게 삶인 것 같다.
수영을 할 줄 모르지만, 살아는 해야겠어서, 본능적으로 몸을 마구 움직여보다가,
어떤 방식으로 하니까 물에서 뜨게 되서 그 방식을 나도 모르게 잡고
계속 그걸 끝까지 파는 거.
그 방식을 계속 "내가 살 수 있는 거"의 방향으로 가는 거.
그게 삶인 것 같은데 조건이 있다.
너가 빠져 있는 물이, 정말 단순한 조용한 수영장의 물이라면,
너가 어떤 수영하는 방식을 알아낸다면,
어느정도 하면, 그 방식이 너에게 익숙해질 거고,
더 연구하지 않아도, 적당히 이 정도만 잘 해도,
물에 가라앉지는 않을 테고, 너는 거기서 기만이 생긴다.
이 기만이라는 건 여유로 연결되고, 새로운 시야를 열 수 있다는 말을 누군가는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이 원리만 다루도록하면 좋겠다. 그렇게 두서없고, 밑도 끝도 없이 가지를 뻗쳐 나가면
무엇을 손에 잡을 수 있겠는가?
근데 그게 중요하긴 하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여성적"인 것.
그 밑도 끝도 없는 전복.
살로메,
기반부터 흔들어 놓는 것.
남자가 기반이라고 생각했던 것 역시, 하나의 가정이고 "지점"일 뿐, 그 지점 안에 든 가치 또한 맹목적으로
난데 없이 생겨났기 때문에, 남자의 태도로만 접근한다면 절대 부술 수 없는 것, 마치 존경처럼 지켜내고,
보수해왔던 부분에 대한 경외감은, 경외감이라는 걸 느낄 수 없는 여자가 흔들어 부수어 놓을 때, 새로운 곳
으로 걸어나갈 수 있다.
다시 이 전 전 문단으로 돌아가면,
그 기만이 생기고, 그 때 기술이 생기고 사회가 발전할 수 있겠지만,
내가 말하려는 비유의 지향점을 다시 찾는다면,
그 사람이 빠진 곳은 수영장이 아니라, 파도가 이는 바다다.
한 가지 방법으로 하다가 물에 잘 뜨는 것 같다가도,
그 방법이 꽤 잘 먹힌다고 생각했음에도,
파도가 다시 치고 물결이 바뀌고, 바람이 일면
그 방법으로 하다보니 물에 가라앉게 되고,
이제는 다시 그 "살아야 해"라는 무턱대고 솟구치는 그 느낌 때문에,
또 다시 이렇게 저렇게 계속 턱 밑까지 차오른 죽음을 감지하며 물장구를 친다.
계속 물장구를 치고, 계속해서 고민하고, 계속해서 목이 조이는 거.
영혼의 현장으로 나를 데려와 주는 외로움과,
삶의 현장으로 나를 데려와 주는 배고픔을 나는 더 느껴야 할 거다.
그래야 나는 진짜 사람이 될 거다.
가끔은 나는 돈이 많으면 진짜 뜨거워지고 뭔가에 미친듯이 집중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이 부럽다.
나는 양심도 가졌고, 정직함도 가졌다.
적당한 돈으로 내 감각에 온전히 집중하며, 쓸데 없는 것에 방해받지 않을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도 가끔은 강하게 든다.
근데 지금은 이렇게도 생각이 든다.
나는 정직하고, 그 쪽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의 관념이 생기면 그 것을 계속 강화하는 방식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홈이 생기면, 그 홈만 계속 파게 된다.
근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나는 깊이 들어갈 수 있지만,
아직 방향을 잘 못 잡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방향을 제대로 잡을 때,
또 사실 깊이 들어갈 능력이 없는데, 깊이 들어갈 능력이 생길 때,
그 것을 이루는 방식은,
외로움과 배고픔을 통해서,
내가 진짜 사람이 되었을 때,
그 때는 돈도 사람도 중요하지 않게 될 것 같긴 하다.
이렇게 지레짐작하듯이 앞을 내다보는 것 같은 내 기만의 가능성도 사라져 버리게 될 거다. (이 문장은 모순의 모순이네)
내가 끔직한 날 것의 비명을 지를 때가 와야 한다.
예술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정신이라는 말을 할 때, 내가 무엇을 정의하려 할 때,
내가 무엇을 판단할 때, 내가 무엇을 단언할 때,
내가 확실함을 가진 것처럼 말할 때,
내가 "이 것"이라고 무엇을 호칭하며, 마치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처럼, 정신적 손을 오므릴 때,
내가 정신이라는 단어를 쓸 때
나는 역겨움을 느끼고, 기만의 가능성과 콘돔을 느낀다.
오늘은 이만 묵혀 놓았던 오만함과 정신의 고름을 다 짜내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