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방 벽 문 밖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정말 느끼는 것
가까이 있으면 말을 전혀 안해도, 실망한 걸 느낀다
아무말 안하고 아무것도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눈치가 보인다
존경하고 멋있고 따르고 싶지만, 내 말이 아닌 말을 삼킬 때
기대에 부응하고 같이 따르고 좋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 마음으로, 그 말에 일단은 따르더라도, 계속해서 해지지가 않는다.
어느 지점 쯤 가면 감각을 잃고 못하겠다 하게 된다.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모른다.
근데 방법을 처음부터 알아서 하는 건 아무도 아니다.
해야 되겠다 하다가 스스로 이것 저것 찾다가 하게 된다.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 때는, 내가 진짜 느낄 때다
다 할수 있는 괜찮은 애가 못 하고 있을 때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건 문제가 안 된다. 그건 자기가 알아서 찾는다.
다만,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게 문제가 된다.
노력할 마음도 능력도 있지만, "있는지도"모를 때 문제가 된다.
여기서 모른다는 건 넓게 쓰인다.
정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게 있고,
말로만 알고 들어서만 알고 있는 거라서 그게 바로 모르는 거 일 수 있다.
똑같은 내용이지만 한계가 있음, 나의 불찰, 언어적인 결론만 있는 것의 한계
그 시간을 겪어본 나는 말로써만 말한다.
나는 그 때 그렇게 크게 뭔갈 느끼고 바뀌게 되었을 때 말로써 듣지 않았다.
그 공간에 있었고, 거기서 정말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꼈다.
직접 느끼고 깨달았다.
근데 바보같은 나는, 나는 그 과정을 겪고 도출해 낸 답이 이거라고 말하며,
동생에게 그 결과만을 말한다.
이걸 느꼈다. 이거다.
그래놓고 동생이 못 깨닫고, 들은 대로 이행하지 못함을 답답해한다.
이걸 느꼈다는 말을 듣는 것과, 그 것을 실제 눈으로 보는 건 정말 다르다.
정말 되는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이게 느껴진다면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건 문제가 안 된다.
알아서 하게 된다.
진짜 느끼는 것
승한이형의 삼촌도 강한 사람이라고 한다.
처음엔 말로 조진다고 한다.
그러면 형은 듣지도 않고 하기 싫다고 한다.
고집이 있기 때문이다.
절대 안 듣고 싫다고 한다고 한다.
근데 삼촌이 하는 걸 본다.
말로 한 그대로 해내시는 걸 보고 형은 저게 진짜 되네 하고 느낀다.
그럼 하게 된다.
내 말이 아닌 말을 삼킬 때 내 감각을 잃고 답답해한다.
나도 그림을 그릴 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한다.
그럼 그렇게 해 보려고 한다. 잘 하고 싶고, 나한테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에.
근데 뭘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 감각이 없다.
그래서 피상적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거였나. 이게 좋다고 했나."
열정은 넘치는데 어떻게 해야할 줄 모른다.
내가 뭘 보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데, 보지도 않은 걸 모방하려고 애써서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
지겹고 괴로워서 포기하게 된다.
눈치 대신 따듯함을 주는게 최선이다.
멱살 잡고 하드캐리하면서 모든 것들을 다 강하게 폭포처럼 두드려내듯이 끌고갈 게 아니라
애매한 찌르기라면, 되려 그건, 자기 말이 아닌 말을 계속 가슴에 꽂아 넣는 거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나에게 안 좋은 눈치나, 싸늘함이나, 감정적인 거부감이 드는 걸
계속 심어 놓으면, 그 부담 때문에 뭔갈 하려 하지만, 내가 느껴본 적도 없고,
뭘 보았는지 뭔 말인지 아무것도 모르므로, 어떤 것이라도 해보려 하며 애먼 이상한 짓을
하다가 지겨움과 괴로움을 느낀다.
하드캐리도 아주 좋은 방법이지만, 그러려면 계속해서 아주 밀착해서 끌고나가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따듯함을 주는 게 더 좋다.
하지만 따듯함으로만은 안 된다.
전해지는 방법도 중요하다.
내가 저 사람을 떠난 것과, 저 사람이 나를 떠난 것이 있을 때,
두 상태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없는 것이지만,
그에 대해 내 마음상태는 완전히 다르다.
"떠나는 게 이뤄지는 순간"은 단 몇 분이나 몇 초에 불과하지만,
그 이후 몇 개월 몇 년간의 감정을, 그 잠깐의 구조로 전혀 다른 감정을 갖게 된다.
내가 떠났다면 홀가분할 수 있고, 내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저 사람이 날 떠났다면, 나는 매여있고 기다리는 존재가 되고, 내 선택이란 없고, 거기에
힘 없이 목적없이 마음을 놔두고 있을 수 있다.
물어보고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과 드러내지 않는 건 완전히 다르다.
나는 원하는 게 있으면 안될 것 같아도 물어본다.
아빠한테 영국에 보내달라고 한 적이 있다.
당연히 돈 없는 걸 알면서도, 무지성으로 배째라는 느낌도 가진 채 말씀드렸다.
안 된다고 하셨다. 나는 설득할 수 있는 구멍이 단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꼈다.
근데 안 된다고 하시니, 그 방법이 안되는 건 확실해져서 다른 걸 생각했다.
생각하고 알아보고, 슬퍼했다가도, 또 다른걸 생각하고 알아보고, 하게 됐다.
그래서 독일을 생각한다.
내 동생들은 부모님의 돈의 눈치를 본다.
학원 가는 걸 죄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면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홀로 온전히 있을 수 없다.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만약 나였다면, 저 학원에 보내달라고 말을 해보고, 안 된다면 슬퍼하긴 하지만,
이 방법이 안 되는게 명료해졌으니, 또 다른 방법으로,
나는 생각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근데 내 동생들은 눈치를 본다.
그래서 공부는 해야겠는데, 학원을 가서 나를 시험해보고 싶고, 배워보고 싶은데,
돈의 그 마음은 아주 비릿하고 지겨운 느낌도 드는 찌린내나는 효심같은 거라,
시원하게 없애버리지도, 태워버리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남아 지린내를 풍겨온다.
그 때 공부와 학원이 결부되어, 학원을 어쩌지도 못하고 있을 때, 공부를 향한
열정도 같이 저며들고 형체가 해체된다.
생각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어디에 가로막혀 폭발하지도 못한 채,
해체된다. 끔찍하다.
"방법을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따듯함이 다"가 아니고,
"말로만 들어서는 깨달음이 아닌 어색한 방황" 후 포기만 유도하게되고,
"가슴에 찌린내 나는 감정들이 남아, 생각을 명료하지 못하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는 "문"이 있는지도 "모른"다.
"모른다"는 건, 눈으로 보지 못했다는 거다.
아는 것은 오로지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낀 것만 아는 것이다.
문이 어딨는지, 문이 있는지도 모른다.
방이 있다.
방에는 알 수 없는 위치에, 보이지 않는 문이 달려 있다.
방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벽은 키보다 조금 높다.
이 방에 있을 때 웬만하면 아무것도 벽 밖에가 보이지 않는다.
소리도 잘 안 들린다. 벽 밖의 세상의 소리는 가끔 들린다.
내가 동생에게 이런 것이 있다! 이런 멋진 걸 해라! 라고 하면,
그건 "방에 들려 오는 소리"같은 거다.
소리처럼 들려오지만, 나에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만 이 벽 너머에 뭔가가 있는 건 알긴 하게 된다.
내가 동생에게, "이렇게 하면 되더라." "이렇게 해."라고 하면,
그건, 벽 밖에 있는 걸 "눈으로 직접 보며 피부로 느끼지"도 못한 상태에서,
내 방에 있던 문의 위치를 설명해 주는 거다.
왜 나가야하는지도 모른 채, 밖에대해 어떤 느낌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동생은, 자기 방을 둘러싼, 벽에 그 위치에 손을 댄다.
하지만 문의 위치는 다르므로 아무 것도 잡을 수 없다.
계속 잡으려고 벽을 긁어보고 만져 보지만 아무데도 없는 것 같다.
단순한 나는, 다 알려주었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못 하는 동생을 보며 실망한다.
나를 실망시키는 것을 우려한 동생은, 형이 말했던 그 지점에 손을 갖다 대고,
허공에서, 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고 당기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단순한 나는 그걸 보고,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생은 사실 벽의 문을 연 게 아니다.
그래서 벽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래서 며칠동안 의지로 하는 것처럼 하다가, 벽 안에 갇혀 있으므로,
괴로워하고 지겨워하고 포기하게 된다.
정말 해 주어야 할 게 뭘까?
보여주는 거다.
쥐어주는 건, 사실 쥐어주는 게 아니다.
되려 그걸 영원히 빼앗는 거다.
왜냐면, 무엇을 원하지도 않은 채, 가슴에 품어보며, 그것을 상상하며,
그것에 자기의 제일 소중한 마음을 덮어보지도 않은 채,
그것을 내가 "소유"하게 되면,
그건 "진짜 존재의 의미" "진짜 소유하는 것" "진짜 내가 그것을 느끼는 것"의
의미에서는, 그건 사라져버리게 된다.
어떤 물건을 간절히 갖고 싶어하다가, 그것을 갖고나면, 이젠 별로 소중하지도 않다가,
나중에는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데,
그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것이,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되는 거다.
되려 그것이 "진짜로 있을" 때는,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그것을 "원할 때", 그것을 계속 생각하고 품고, 내 여린 마음과,
가끔은 최고의 이상으로 만드는 그런 상상들을 거기에 덧바르고, 그 안에 적시고 할 때,
그 때 "그 것"이 나에게 "실제로 있는"거다.
근데 그런 과정도 없이, 그것을 쥐어 주게 되면, 그건 바로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거고,
만일 그게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면, 인생의 아주 소중한 깨달음을 빼앗는 거다.
절대 쥐어줘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강제로 들고 있게 해서도 안 된다.
그건 벽 밖을 실제로 보지 못한 채, 허공에서 문 여는 시늉만 하라고 하는 거다.
우리는 실제로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것들을 정말 내 눈으로 보고, 피부로 깨달을 때가,
"진짜 이해"하게 된 거다.
실제로 눈으로, 직접 피부로. 정말 진짜인 거.
그러면 그 살아있는 이해, 느낌, 그 충격 때문에 벽을 인지하게 된다.
나는 벽에 있었구나.
그리고 나가고 싶어한다.
그 누구도 그 방을 둘러싼 벽의 어느 부분에 문고리가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는 문고리를 어떻게든 찾으려고 한다.
이유도 없다. 내가 찾기 때문에, 찾으려고 한다.
그저 찾는다는 행동이 있는 "현재"를 온전히 살아내게 된다.
그 때는 과거도 미래도 없이, 현재만 온전히 존재한다.
방법을 모르지만, 이곳 저곳 둘러본다.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지만, 계속 현재에만 존재하며, 그것을 골똘히 생각한다.
그 때 우리는 자연물에서, 아니면 사소한 것에서, 아니면 되려 엄청 큰 것에서
영감을 받고, 이런 곳에 문이 있을 수 있겠다는 거나,
이런 식으로 해봐도 되겠다며 어떤 단서같은 것을 얻게 된다.
그 것은 나의 최초의, "온전한 나"의 단서가 된다.
그리고 문 고리를 찾게 된다.
그리고 열고 나간다.
어제 승한이 형이랑 했던 재밌는 얘기가 있는데 이렇다.
그냥 따듯한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에서 시작됐다.
예를들어, 이렇다.
동생이 있는데, 동생에게 삼겹살을 알려주려면,
내가 저기 지나가는 멧돼지를 잡아서,
직접 다 분해하고, 삼겹살을 먹기 좋게 만들어서,
구워먹을 때 동생을 부르고 같이 먹으면,
동생은 삼겹살을 어떻게 해야 먹을 수 있는지도, 찾지도 않게 된다.
아니면,
동생에게 삼겹살을 먹으라고, 잡아서 먹으라고 강요하면,
이거는 되려 삼겹살을 안 먹게 되고, 안 찾게 되고, 싫어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따듯함을 너무 추구해서,
동생이 뭘 하든 가만히 두게 되면,
어떻게 동생이,
저기 지금 지나가는 멧돼지를 보고 삼겹살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사람이 삼겹살을 알지도 못하는데,
그 무서운,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가 제일 자연스러운 멧돼지를
사냥을 할 생각을 하고, 잡아서, 그 부위만 어떻게 먹으려고 생각을 하겠는가?
따듯하게 있는 건, 바로 그렇게 만든다.
아무 것도 모르게 된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동생이 저기 오고 있을때,
나는 옆에서 삼겹살을 굉장히 맛있게 먹는 거다.
와 진짜 맛있다. 와 츄왑츄왑. 크. 촵촵. 쫩쫩. 아 맛있다 진짜
그럼 그걸 본 동생이 와서 "나 하나만 줘"라고 하면,
나는 "싫어"라고 한다.
얌냠 촵촵 아 진짜 맛있다.
그럼 동생이 어떻게든 먹고 싶은데 자기한테 안 주니까, 물어본다.
"그럼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그럼 나는 말해준다. "몰라. 저 멧돼지한테서 나왔어."
그러면 그 때 이제 동생이 깨닫는거다.
아, 멧돼지에서 저런 맛있는 고기가 나오는 구나.
나도 먹고 싶다. 아.
그래놓고 이제는, 맨날 지나다니던 멧돼지를, 이제 잡을 생각을 하고,
어렵게 잡아놓고 나면,
멧돼지를 갈라놓고 나서, "아 그게 뭐였지."
하면서,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고, 저렇게도 이렇게도 구워 먹어본다.
그러면서 얘는, 자기만의 삼겹살을 찾고,
형이 먹었던 삼겹살보다 더 맛나고, 자기 입맛에 맞고, 자기가 좋아하는 삼겹살을
찾게 되는거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면 더 맛있었지, 하며 더 좋은 삼겹살을,
자기도 모르게 계속 찾아나가게 된다.
이 때는 찾아나가려는 "의지"란 거의 중요하지 않다.
"찾는 행위"만 존재할 뿐, 찾아야겠다는 그런 건 전혀 없다.
동생은 결국에 정말 맛있는 걸 찾게 되고, 자기가 계속 맛있는 걸 찾아나가게 된다.
그리고 멧돼지가 아니라 다른 것도 시도해보게 되고, 여러 것들을 시도해 보게 된다.
인생을 겨우 조금 더 살았지만,
조금 더 살면서, 그 때 이런 걸 알았더라면 하는 점이 있을 때,
그런 것들을 알려주고 싶을 때,
절대 쥐어주거나, 방법만 알려주거나, 방관하면 안 된다.
삼겹살을 옆에서 굉장히 맛있게 먹고 있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