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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독일어를 준비 중이다.

작년 22년 6월에 자퇴 후, 바로 안사균 선생님의 최신독일어를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로, A B C도 유튜브로 따라해보았다.


맨 땅에 머리를 2달정도 박았는데, 

별로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시간을 많이 들여 공부했는데도, 머리에 전혀 남는 게 없고,

의미없는 잔상이나, 독일어 문법을 다루는 한글 쪼가리들만 남았다.

보험회사를 퇴사하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을 깨닫고, 이직을 하면서 다르게 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시원스쿨에서 민병철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회사에서 12시간 일을 하면, 오전 10시나 오후 10시가 되었다.

그러면 12시까지 2시간동안 강의 2개~3개를 들었다.

강의 2개를 들은 날은, 배운 걸 머리에 넣으려는 날이었고,

강의 3개를 들은 날은, 어떻게든 계획세운 일정을 맞추려고 했던 날이었다.

이 회사도 11월 말일에 퇴사권유를 받고 나가면서 보니, 내가 해 놓은 실력이 아무것도 없었다.

읽지 못하는 독일어도 있었고, 단어는 하나도 안 외워놓았었다.


그 다음 직장으로 옮기고 시간이 많이 났다.

11월 초부터, 12월말까지, 숨고라는 사이트에서 알게 된 독일어 선생님과 수업을 했었다.

선생님은 독일어 Telc 시험 전문이셨고, 쉽게 말하면 시험을 위한 독일어를 가르치셨다.

물론 그 밑에서 최소한 필요한 틀들을 잡아갔다.

나는 혼자 인강을 들으며 1에서 10까지 있다면, 8까지 해 놓은 상태였는데,

정작 8은 아는데 1 3 4 이런 초반에서 구멍이 너무 컸다.

그래서 처음에 따라가기 힘들었고, 이건 당연히 알겠지? 하며 나를 바라보시는 선생님과

엥 그게 뭐죠?라는 표정으로 되묻듯이 빤히 바라보는 나의 얼굴 사이에

그 어색한 정적은 자주 있었다.


12월 말에 텔크 B1시험을 보고, 난 그 선생님을 그만 뒀다.

외운대로 대본을 달달 말할 줄은 알았지만, 내 생각을 단 하나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월동안 Klipp und Klar라는 문법책을 혼자 쭉 훑으며, 빈 공간을 채우려 했다.

1월에 공부한 날은 13일정도 된다.

1월엔 일도 안했는데, 공부도 저것밖에 안 했다. 정말 손이 안 갔다.

(그림은 혁신이 일어나긴 함.)




그리고, 2월이 되면서,

1월 설날에 작은 외삼촌과 큰 외삼촌께, 내 포부를 말씀드리며,

혹시나 도와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내가 열심히 공부한 노트도 보여드리고,

독일어 할 줄 아냐고 하셔서, 그 앞에서 B1 텔크시험의 Sprechen 대본을 읊었다. (이런 위선자녀석..)

잘하는 척 했다. 열심히 한 척 했다.

그리고 다들 헤어질 때 쯤,

작은 외삼촌이 삼열이 와봐 라고 하셔서, 방으로 갔더니 50만원을 건네주셨다.


외삼촌 :   삼열아 들어 와봐.

성삼열 :   엇..           (다 알고 있음)

성삼열 :   (방에 들어감)

외삼촌 :   체가페.     (뭔갈 주시며 바로 나가시면서)

성삼열 :   아.. 감사합니다. 근데 잘 못들었어요.       (외삼촌을 잡으면서)

외삼촌 :   책값 하라고오.

성삼열 :   아 감사합니다..! 아..




못 받을 거 받는 것처럼 아 소리를 내는 게 참 꼴불견이긴한데, 감사하게 받으려는 내 최선이기도 했다.

시원하게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말은 아직 잘 안나온다.


근데 정말 정말 감사했다.

갑자기 1월 월급을 안 준다는 일하는 곳의 형 때문에 앞이 정말 막막했었다.

맥북 할부값 28만원도, 다음 달 마페베라퉁 수업값 30만원도, 핸드폰값 35000원도,

버스비 7만원도, 담배값 5만원도, 대출이자 15000원도, 연필도 지금 없는데...


근데 세뱃돈이 아주 놀랍게도, 천원의 자리수까지 딱 맞았다.

외삼촌이 주신 50만원은 빼고.





주신 걸로, 괴테 독일 문화원을 가려고 했었다.

근데 진짜 마음 크게 먹고, 온라인 테스트도 치루고, B1.1 B1.2 둘 중 하나로 들어가는 배정까지 다 받았는데,

알아보니, 2월에 "초집중 강좌"가 없었다.


있긴 한데 오전에만 있고 오후엔 없었다.

나는 오전에 일을 하는데.. 아..




전화해서 혹시 수업이 새로 추가될 예정은 없냐고 여쭤봤다.

차갑게 없다고 했다. 기분도 좀 상했다. 전화 받은 사람한테.








나는 이대로 하나님이 날 버릴까 싶었다.

내가 다리에서 뛰어 내릴 때 가졌던, 나를 챙기실 거라는 마음은

발이 박살나버리고 다리를 절고 걸어다니며 사람들 눈치 보며 마음속으로 울며 사라졌었다.


사탄이 절벽 꼭대기에 예수님을 데려다 놓고, 뛰어 내리면 천사들이 잡아줄 거라고 했었다.

거기에 예수님은 말하셨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걸 발이 부서진 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으며 그 책 안에서 접했다.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아. 난 사탄처럼 하나님을 시험했구나.

나는 뭘 믿고 뛰어 내렸던 걸까?

내가 그 때 믿던 그 운명이나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는 인생같은 건 그냥 내 착각이었구나.


그 때, 앤디워홀의 몇몇 작품과, Si그림책학교의 교장의 영향을 굉장히 강하게 받는데다가,

결정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을 잘못읽으면서 내 마음이 완전히 텅비게 되는 때가 있었다.

"내가 아픈 건, 이걸 통해 뭔가를 배우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가 다리에서 뛰어 내렸으니, 발이 부서진 거였구나."

"운명은 없다!"

이랬었다.


어떤 것의 부활은,

이전의 온전하던 그 모습 그대로의 재현이 아니고,

그 부활은, 이전의 온전하던 그 모습을 갈기갈기 해체시켰던 그 방법으로, 부활시키는 게 아니다.


큰 원리에서, 양 극단 사이를 우리는 오간다.


예를 들자면,

영웅이 있고, 그 영웅의 아우라가 식어갈때 쯔음,

부랑자가 나타나서, 그 영웅을 칼로 베어 죽인다.


영웅은 죽고, 부랑자도 도망친다.

영웅의 자리가 비어 있다.


그러다 영웅이 새로 나타날 때는,

갈라진 배에 내장을 집어넣고, 그걸 다시 꿰메거나,

온전하게 무언가를 우리가 만들려고 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영웅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나타난"다.





걸을 때마다 너무나도 아프고 슬퍼서 낑낑거리며 울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발이 부서진 건, 내가 다리에서 뛰어 내렸기 때문이다.

다리에서 뛰어 내리면서도 발이 멀쩡하길 원했던 건 나였고, 신은 지시도 하지 않으셨다.

나의 단독행동으로 벌어진 일에, 

이제 와서 매일 밤 아파하고 기도하고, 아침마다 다시 아플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건,

하나님을 더럽히는 거고, 너의 잘못을 모르는 거다.


그때 마침 융의 책에, 운명을 시험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었던 게 생각났었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는 것이,

무엇을 바래놓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너무 괴로워 하고 슬퍼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게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절대적이고 깨끗한 하나님께,

유치한 나의 잘못과 소원을 빌어놓고, 혼자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라고 생각됐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절대적임을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기도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신을 산 채로 관에 집어 넣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그러고 영국에 갔고, 정말 외롭고 힘든 와중에도 성경을 계속 읽었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건 무엇일까, 제일 중요한 건 무엇일까?

내가 살아야 하는 의미가 어디에 쓰여 있을까?

신의 원칙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도 확실함의 영역에서 말로써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여전히 성경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마침 읽던 책이었던, "고흐의 편지"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동경이라는 말을 찾아냈다.



동경과 천착. 트라우마.

이렇게 세 단어는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좀 다른데,

공통점은 우리의 삶의 어떤 경향을 만들어주는 거였다.

아무런 이유도 찾을 수 없지만, 우리의 삶에 일정한 경향을 만들어주고,

그것을 하게 하는 게, 어렸을 때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가슴 속에 담기게 된 경향성.


그리고 "멋진 것" 이라는 감각.


이 둘이 내가 찾은 거였고,

나의 천착과, 내가 생각하는 멋진 것이 무엇인지 찾다가도,

천착은 강렬한 외로움 밑에 뭉개졌고,

멋진것이라는 건, 의미 또는 진실같은 단어를 말하는 나에게 너무나도 허세와 위선으로 여겨졌다.


그 때는, 결국엔 모두 허세구나라고 생각도 했다. 베이컨의 영향이 있다.










아무튼 그런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근데 정말 순결했던 정신이었다.












영국에 있던 중 나에게 들어왔던 생각은,

부활은 절대 그것이 해체된 방식으로 재조립되듯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나의 의미도, 믿음이 (나의 얄팍한) 논리에 의해 박살이 나 버렸는데,

나는 계속해서, 다시 그 논리로써 믿음을 나에게 확신시키려 했다.

그 끔찍한 강박에서도, 나는 이 위에 말했던 방식으로만 다시 세워질 수 있음을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내가 있었던 Llanelli의 그 단체를 이끌고 있던 한국인 리더는,

너무나도 맹목적이었고, 자의적이었고,

생각이 너무 단순하고, 얄팍했고,

자존감이 낮았고, 그래서 옳음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내가 이 말라붙은 정신의 파편에서, 다시 무언가를 세우려면,

내가 있는 곳의 정 반대의 지점으로 뛰어들어야 했는데,

이 리더가 있는 지점이 그런 류인 것 같은데,

이 리더가 있는 곳이 내가 갈 곳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오래 힘들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바라는 기도보다, 

왕 앞의 충성스러운 기사처럼, 

"해 내겠습니다."같은 기도를 했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왕을 위해서만,

그리고 왕을 빛내는 방법은 이 것 뿐인 것 같았다.








그러다 학교에 복학했고, 학교 역시 힘들었다.

꿈 꿨던 모습이 있었고, 그건 높았다.

근데 학교 자취방에서, 쓸모 없이 초라하게 눕혀져있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창문을 열고 영어로 크게 떠들고 랩을 하며 내가 영어를 잘 하는 걸 드러내려 했었다.

방을 아주 예쁘게 꾸미고, 내 서재에 가득한 내가 읽었던 책들을 은근 드러냈다.

내가 불만족 스러웠고, 내가 있는 곳이 불만족스러웠다.





그러던 와중에는, 이 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에 석사로 가려고 했다.

영국 유학원에 전화를 해서, 그 원장과 한 시간동안 통화를 하며 내 열정과 생각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 분께 글라스코 스쿨오브 아트의 Pre 석사 과정에, 자기가 말해서 꽂아준다는 말을 들었다.

난 그 말이 나의 증명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훌륭해. 나는 이렇게 될 거야.





주말 아침엔 일어나, 옥상으로 올라가서, 칸예 웨스트의 24를 들으며

신께 감동하며,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환희를 품으며 눈물을 짜냈다.

평일 밤에는, 비행장 본관 도서실에서 나와서 혼자 어두운 곳 가운데 가로등 옆에서,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ASCEND를 들으며, 행복해하면서도 그 감동에 슬퍼했다.

신경질적이었고, 예민했고, 외로웠다.


노래를 들을 땐, 나의 다른 미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노래를 계속 들었다.

다른 미래를 꿈꾸며 몇 개월이 계속해서 반복됐다.







그러다, 아빠한테 아빠께 말씀드렸던 아이엘츠 시험료가 사실은 파일럿을 위한 게 아니라, 영국으로 가기 위한 거라 말씀드렸다.

내 속 마음의 절반은, 솔직히 말씀드려야 겠다는 양심의 찔림과,

그 나머지 절반은, 난 유학 갈 거라는 배 째라는 생각이 있었다.

아빠는 아무 반박도 할수 없을만큼 단호한 몇 마디를 하셨고, 나는 힘들었다.




그러면 파일럿이 되고 돈을 벌어서 내가 직접 영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것 저것 알아봤었고,

미국 시민권을 따는 방법이나, 미국에서 비행하는 것, 아랍의 비행 교관이 되는 것, 영국의 기장 인턴 프로그램, 루프트한자 등

정말 많은 방법을 알아냈고,

내 목표를 잡았었다.


그래.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나는 비행을 이 때까지 이만큼 마치고, 이렇게 해서, 미국에 가고, 미국 여자와 결혼하고, 미국에서 파일럿을 해야지.

나는 영어도 잘하잖아. 아빠도 파일럿을 위한 돈은 다 대준다고 하셨어.













사실 그 때 돈이 별로 없었다.

생활비 40만원을 받으면, 시골의 이상한 난방 가격 책정으로 8만원이 난방비로 나갔고,

핸드폰비와, 대출이자 등을 빼면 20만원이 조금 넘게 남았다.

학교 동기들은 100만원은 넘게 쓰는 것 같았는데,

그 사이에서 나는 복학 전에 사뒀던 옷을 돌려가며 입으며, 있어보이려 했고,

밥 먹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제일 싼 걸 먹거나, 안 먹었다.


그렇게 힘든데 아빠가 나를 미국에 보내주신다고? 

하시나 보다. 집 팔아서도 보내주시려나보다.

그 때 있었던, 돈으로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하며 신경전을 계속 벌이던 동기한테도 말했다.

나 아빠가 미국 보내준대.




그래놓고 열심히 했는데, 

어느 날인지 모르겠다.

비행이 잘 안 되었었고, 예민했었다.

난 그 때 있었던 웨일즈의 여자친구에게 잘 해주지 못했다.

메세지도 하루에 한 번 보고, 그 한번도 자기 전에, 나 자러간다는 말만 했다.

전화를 하면 빨리 끊고 싶어했고 답답해 했다.

전 여자친구가 영상전화를 하며 외롭다고 울어도, 나는 차갑게 아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여자친구를 외면하려고 했었다.



그 이유는 지나고 생각해 보니 이런 것 같다.

나는 영국에서 완벽한 꿈들과 이상, 신념들을 말했었다.

전 여자친구가 스스로 가진 힘든 부분들도, 내 강한 태도와 확신으로 위로해주며, 

괴로울 수도 있지만 멋질 게 분명한 미래를 말했다.


근데 자취방에 있는 나는 너무 초라했다.

여자친구가 생각하는 나는 너무 높고, 내가 말했던 것들이 다 기억이 났다.

나를 대해주는 그 기대가 나는 거북했던 거였다.

나는 훌륭하지 않은데, 나는 지금 잘 못하고 있는데.

여자친구의 말들을 들으면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기도 했다.


그래서 전화를 받으면, 괜히 공부를 해야할 것 같은 충동이 들고, 전화를 끊고, 공부를 하려다 안했다.




아주 머저리 쓰레기 같이 있었다.

그러다, 아주 예민하고 마음이 힘든 날에 여자친구한테 전화를 했는데,

여자친구가 차가워졌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 때까지 아무 생각도 없고, 귀찮았던 여자친구의 메세지가 너무 귀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느껴지는 건, 이틀 전부터 여자친구의 메세지 답장이 늦었다.

사실 나는 몇 달동안 메세지 답장을 거의 안하고, 귀찮은 티를 냈었고, 차가웠는데,

여자친구의 잠깐의 차가움에 나는 발발 떨었다.


무서웠고 계속 신경이 쓰였다.

3일정도 계속 그렇게 발발거리다가, 3일째 밤에 전화하면서, 나를 안 사랑하냐고 말했더니,

애처럼 굴지 말라고 했다.

나는 더 울려고 했다.



지금 보면 얘도 엄청 실망했을 것 같다.

나의 '전'과 '후' 때문에.













그러고 헤어졌다.

헤어지니 마음이 편했는데, 그 잠깐 후 힘들었다.

그 주 주말엔 가로등도 없는 길을 따라 바다까지 뛰면서, 달한테 손을 뻗고 달리면서 울었다.








그 이후에는 무슨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여자친구로부터는 마음은 괜찮아졌는데,

파일럿으로써의 앞길이 굉장히 멀었다고 느껴졌었다.



아빠의 단호한 말 이후 잡은 새로 잡은 계획에 따르면,

27살졸업, 28살 미국비행, 29살 미국비행교관, 30살 미국비행교관, 31살 미국비행교관, 32살 미국 화물기 ~

해서 37살정도에 아주빨리 기장이 되면, 돈을 2년 모아서 39살에 영국에 갈 수 있었다.


그 생각이 들고 앞이 암담하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하루 이틀 후, 저녁쯤에,

이 전에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놔 뒀었던 번개탄 6개 중 3개를 꺼냈다.



불이 나서, 이 건물이 타면, 내 가족이 부담해야하므로, 엄마아빠가 힘든 건 싫어서, 번개탄를 냄비에 담았다.

냄비가 뜨거워져서 바닥이 녹아서 불이 붙을수도 있으므로,

냄비받침으로 책이 필요했다.



세개의 냄비에는 번개탄이 하나씩 담겼고,

각 냄비의 밑에는 "고흐 영혼의 편지", "젊은 예술가의 초상", "죄와 벌"이 있었다.

죄와 벌 대신 성경을 놓으려 했는데,

자ß& 살을 하려는데 성경을 놓는 건, 신께 파렴치한 것 처럼 느껴졌다.

냄비의 간격을 떼어 놓으며 회개 기도를 했다.


보일러실에 들어가서 이산화탄소 경보기를 뺐다.

그리고 불을 붙였고, 불이 붙었다. 

냄비에 담겨서 산소가 잘 안들어가서 그런지, 첫 번째 번개탄에 불이 잘 안 붙었다.

그래서 화장실에서 휴지를 가져와서, 휴지에 불을 붙이고, 번개탄 밑에 놨다.


모두 불이 붙고, 보일러실에 연기가 찼다.

연기가 매워서 눈물이 났는데,

난 슬퍼서 울며서 죽는 게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 걸 받아들이고 

비장하게 죽는 건데, 내 시체에 눈물 자국이 있으면 창피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급작스러운 변화는 없었고, 몸에 힘이 조금씩 안 들어갔다.

방의 대부분이 하얗게 찼다.

하나님 이런 저를 여린 저를 지옥에 보내실건가요? 하고 물어봤다.

그리고 내가 죽어도 엎어지지 않을 엉덩이와 발 각도와 벽의 각도를 잡고 앉아서 기대어 있었다.



근데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경보기가 울렸다.

내가 세워놨던, 한번 정도 더 그릴 정도만 남아있던 캔버스를 말아논 기둥의 뒤에 CO2 경보기가 하나 더 있었다.

그 좁은 보일러실에 두 개나 있었다.

알람벨이 울리면, 죽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몰려올 것 같아서, 서둘러 알람벨을 해체했다.

그리고 보일러실 밖의 내 방으로 나와, 경보기를 옷장 밑에 던졌다.

그리고 다시 보일러실에 들어갔는데,

죽을 기분이 아니었다.




이젠 새로운 삶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왕 죽을 거면, 내가 원하던 걸 무턱대고 하고 죽으려 했다.

보일러실에서 나와서 침대에 엎어져서 다짐했다.

"자취방을 빼면 250만원 정도 나오니, 그 걸로 미국에 넘어가서, 할렘가에 가서, 흑인들에게 다가가서,

나도 같이 일하겠다고 해야겠다.

만약에 나를 죽이면, 그렇게 죽으면 이거보다는 좋은 거고,

걔네들이 안 끼워주면 내 딴에 이거저거 해 보다가, 노숙자가 되어 구걸하게 되면,

그 구걸하며 죽는 것도 정말 행복할 것 같다."






그래서 다음 날 집 주인을 찾아가서 자취방을 빼겠다고 말했는데,

마음이 참 후련했다.

근데 이제 보니 다른 게 보였다.

영국에 못 가면, 독일에 가면 되는 거였다.












내 20대에는 정말 여러일들이 있었고 아직 시원하다고 느낄 만큼 말을 못했지만,

방금 말한 내용과, 지금 내가 블로그를 쓰며 독일을 준비하고 있는 때가, 인생의 큰 분기점인 것 같다.



내 인생의 분기점이라고 거창하게 말한다면...

이 때 다짐했던 게 있다.








전 여자친구를 사랑하지 못했고, 나의 위선을 느꼈던 게 계속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가려면, 얘와 계속 연애를 해서, 영국에 거주할 수 있는 비자를 얻어야 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데도 계속 같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동시에, 얘를 여권으로 본 순간부터 내 사랑이 없어진 것 같기도 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도둑질도 하고, 몸도 팔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랑도 사실 없고 성욕만 있다고 생각했었다.

단순하지만,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나에게는 사랑보다 존경이 더 크고, 사랑한다고 느낄 때의 마음과 어떤 분을 굉장히 존경할 때의 마음이 정말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게 내 믿음이 무너진 것과 합쳐져, 애인을 무언가를 배우거나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고, 인생을 차갑게 바라보았었는데,

이게 너무나도 그릇되게 느껴졌다.






그래서 다짐했던 건,

" 무언가를 바라고 누군가를 만나지 않겠습니다. " 였다.

잊지 않기 위해서, 자퇴하는 순간에 마음 속으로 두 번 말했다.













사실 바로 윗 말이 중요하고, 내가 요즘 느끼는 어메이징 토커라는 곳의 독일어 선생님과의 감정반응에 대해,

바로 윗 다짐에 대해 말하려고 했는데,

나는 이렇게 하나를 말하려 하면, 거의 모든 과정과 그 깨달음을 말한다.

그래서 좀 많이 돌아오듯이 말했는데, 그래도 쓰길 잘한 것 같다.

두서 없지만, 제대로 쓴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에도 같은 내용을 또 쓰면서, 나만 기억하는 나의 소중한 인생을 끝까지 기억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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